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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8 09:32
130등 아들 박사로 만든 '아버지가 가르친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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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수백 포기 낟알 세며 정직 가르친 아버지
보릿고개를 넘는 게 가장 큰 과제였던 1960년대, 전국 농촌이 벼 품종 개량에 몰두했다. 어느 가을 밤 전남 고흥군 대서면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이었던 송병수(83)씨는 밤새도록 마을에서 수확한 벼의 낟알을 일일이 세고 있었다. 기존 벼와 새 품종의 수확량을 비교해 군청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서너 개 품종별로 각각 50포기씩 뽑아 수확량을 계산했다. 여느 공무원은 대개 벼 한두 포기만 비교해 보고서를 작성하곤 했지만 송씨의 생각은 달랐다. 정확한 비교를 위해 고된 작업을 자청한 것이다.
인성=실력 보여준 송하성 교수 가족
초등학교만 나와 서른에 면 서기
품종별 수확량 정확히 보고하려
다들 한두 포기 셀 때 50포기씩 뽑아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서른의 나이에 공무원이 된 아버지가 강조했던 말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그는 늘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할 것과 결과보다 과정을 중히 여길 것을 강조했다. 어릴 적 연을 만들어 날리는데 유독 송 교수의 연만 꼬라박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뼈대 만드는 법부터 실 감는 요령까지 차분히 알려줬다. “권위적인 아버지 같았으면 ‘사내 놈이 연도 하나 못 만드냐’며 타박을 줬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결과를 놓고 탓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 방법을 천천히 알려주셨죠.”
송 교수는 어릴 적 우직하게 볍씨를 세던 아버지처럼 3년간 성실히 공부한 끝에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경제기획원에 근무할 때도 아버지는 수시로 “혼자서만 잘살기 위해 공부하지 말고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자신에겐 엄격했지만 자녀에겐 다정다감했던 아버지의 소통 노력도 자녀의 인성 함양에 영향을 미쳤다. 변변한 동화책 하나 없던 시절 아버지는 한자가 빼곡한 『삼국풍류』와 같은 역사소설을 자녀들의 눈높이에 맞게 재미있게 읽어줬다. 조그만 단칸방에서 삼국통일을 놓고 펼쳐지는 왕건·궁예 등 영웅들의 이야기는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었다. ‘안방극장’이 끝날 무렵엔 아버지는 자녀들의 의견을 물었고, 6남매는 서로 토론을 벌이다 잠들었다.
인사예절은 인성교육의 가장 기본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마을 어른에게 깍듯했다. 처음 보는 노인에게도 공손히 인사하고 차근차근 안부를 물었다.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사람은 멀리했다. 송 교수는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배우면서 바른 예의를 갖추고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가짐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고 말했다.
회초리를 들 때도 있었다. 특히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다. “딱 세 번 매 맞은 적이 있어요. 집의 달걀을 훔쳐 아이스크림과 바꿔 먹고, 학용품 산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돈을 타냈을 때처럼 모두 거짓말을 했을 때였죠.” 대신 자녀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잘못이고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고 말하도록 했다. 송 교수는 “아버지께 한 번 혼나고 나면 남매들은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교육 방식은 아들의 자녀 교육으로 이어졌다. 송 교수는 딱 한 번 자녀를 체벌한 적이 있다. 큰아들이 6학년 때 세 살 어린 둘째 아들을 이유 없이 때렸을 때다. 송 교수는 아버지가 그랬듯 무작정 혼내지 않았다. “스스로 뭘 잘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한참 동안 대화했습니다. 무조건 ‘네가 잘못했다’고 말하면 아이는 스스로 잘못을 깨치지 못하잖아요.” 그는 “많은 부모가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막말을 한다. 하지만 부모의 언행은 아이 인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였다.
송 교수의 삶도 아버지의 삶을 닮아갔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새로운 업무가 떨어질 때마다 늘 새벽까지 호롱불을 켜고 공부했다. 돼지 콜레라가 유행할 때는 전염병 서적을 읽고 돼지 농가를 찾아가 직접 주사를 놓았다. 틈틈이 영어·일본어도 독학했다.
송 교수도 아버지처럼 최선을 다했다. 1985년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뽑힌 그는 기초 수준의 프랑스어만을 배운 상태에서 유학길에 올랐다. 하루 두세 시간만 잠자며 공부에 열중한 끝에 파리1대학에서 3년4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인 르몽드에 그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글=윤석만·전민희 기자 sa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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