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AN 찰스 김 회장(31회) '한인사회와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

by Dale on Mar 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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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iCAN 찰스 김 회장 (김철주 31회) "한인사회와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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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N 찰스 김 회장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iCAN 찰스 김 회장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19세에 이민…미군 입대 
제대 후 USC서 정치학 전공 

대학시절 한인사회 봉사 열심 
유권자 등록·청소년 학업 도와 

83년 한미연합회 창립 주도 
03년 KAC 초대 전국회장 

07년 정치단체 아이캔 조직
"한인 청년들 정계진출 돕고파" 


영원히 청년일 것 같던 그가 어느새 이순을 넘겼다. 1980년 이래 때론 뜨겁고 때론 위태롭고 때론 행복했던 한인사회 역사의 현장 곳곳에서 고군분투했던 아이캔(iCAN ) 찰스 김(61) 회장이다. 우리에겐 한미연합회(KAC) 사무국장으로, 영 김(54·공화당) 전 가주 하원의원의 남편으로 친숙한 그는 2007년 KAC 전국회장 사임 후 잠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 듯 했지만 그동안 그는 정치활동 단체인 아이캔을 조직해 오렌지카운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강산이 한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다. 지칠 법도 한데 여전히 청년처럼 바쁘고 활기차게 살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음악 청년에서 정치학도로 

서울 출생인 그는 고교 졸업 후 19세 때인 1975년 가족이민으로 LA에 왔다. 학자와 예술가가 많았던 외가 쪽 영향으로 그는 차이코프스키와 브람스 등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교시절엔 명동에 있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며 LP 300여장을 모을 만큼 클래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이 음악 청년은 LA에 와 석 달도 채 안 돼 미군에 입대했다. 

"영어도 배우고 제대 후 학비도 지원받을 수 있다 해서 남동생과 함께 육군 입대를 했죠. 당시 김치 G.I라는 말이 성행했을 만큼 미군 혜택이 좋아 적잖은 한인들이 미군에 입대를 하던 시절이었죠."

앨라배마 육군 항공본부에서 헬리콥터 정비 기술을 익힌 그는 훈련을 마치고 하와이 25사단에 배치돼 그곳에서 2년 반 가량 복무했다. 당시 그는 미국 최초의 한인교회에 출석하며 청년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곳에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백세가 넘으신 최초 한인 이민자들을 만나며 한인이민 역사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당시 매주 병원으로 찾아가 가스펠 송을 불러드렸는데 병상에 누워서 눈물을 흘리며 제 손을 잡던 그분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그러면서 한인사회와 이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제대 후 LA로 돌아온 그는 1년 뒤인 1980년 캘스테이트LA를 거쳐 USC에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그는 캘스테이트LA 한인학생회 교지인 '넝쿨'을 창간,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고 USC 재학시절엔 '코리안 스트리트 저널'의 학생기자로도 활동했다. 또 KYC에서 활동하며 한인 청소년들의 대학진학을 돕기 위해 SAT 강의를 했고 영어가 힘든 한인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개인교습과 멘토링을 하는 등 한인 청소년들의 이민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원조 1.5세 

그는 1.5세라는 말을 처음 쓴 이다. 1983년 한인청소년센터(KYC·현 KYCC)와 UCLA가 공동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그가 이 단어를 처음 썼고 이후 한인 언론매체들이 이를 사용하면서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한미연합회(KAC). KAC는 1982년 한인사회 최초의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이며 인연을 맺은 그와 정동수 변호사, 던컨 리 변호사 등이 주축이 돼 한인 인사 30여명이 의기투합해 1983년 한인사회 권익을 대변하고 정치력 신장, 리더십 양성을 위해 조직된 비영리단체다. 

"KAC가 설립된 1983년은 한인사회의 르네상스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 해 한인사회 대표 비영리단체들이 대거 출범했고 그 무렵 매년 3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한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면서 한인사회 및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활동도 활발했어요. 또 연극, 가요제 등 한인사회에서 문화 활동도 가장 왕성했던 때이기도 했죠."

이뿐만 아니다. 그는 1983년 UCLA-USC 한인 학생회와 힘을 합쳐 양교 간 스포츠 대항전을 시작했고 가스펠 송 모임인 '필그림'을 조직해 공연도 하는 등 한인 청년들과 어울려 다양한 예체능 활동도 펼쳤다.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었던 셈. 

"맞아요. 당시엔 별걸 다했죠.(웃음)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뛰어가 일하다 보면 또 다른 필요가 보여서 또 그 일을 하게 되고…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네요."

#한인 정치력 신장위해 뛰다 

그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KAC 사무국장으로 활동했고 당시 만난 영 김 의원과 결혼했다. 이후 네이트 홀든 LA시의원 보좌관을 거쳐 89년과 91년 두 차례 세리토스 시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92년 4.29 LA폭동 당시 그는 KAC 이사로 정부기관과 한인사회를 잇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며 폭동 피해자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1994년 그는 KAC 사무국장으로 돌아왔다. 이후 2003년까지 근 10년간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KAC의 연예산은 1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로 껑충 뛰었고 LA뿐 아니라 알래스카, 시카고, 워싱턴D.C 등에도 지부를 건립, 2003년 그는 KAC 전국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07년 KAC 전국회장에서 물러난 뒤 곧바로 오렌지카운티에 전문적인 정치활동 단체인 iCAN (inter-Community Action Network)을 창립해 청소년 인턴십 프로그램, 한인 유권자 성향 분석, 한인 후보 발굴 등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이캔은 2008년 부에나파크 시의원 선거에서 친한파 정치인인 프레드 스미스 전 시장을 당선시킨 이래 오렌지카운티 각종 선거에서 10여명을 당선시키는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아이캔을 조직한 지 10년이 다 되가는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역시 리더십 트레이닝이죠. 미국에서 손님으로 사는 것이 아닌 주인으로 살기위해 한인 젊은이들의 정계 진출을 도와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에 일조하고 싶은 게 제 오랜 꿈입니다."

그렇게 한인사회 곳곳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눈썹 휘날리며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30년 넘는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

"감사하죠. 그 시간동안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인사회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현장을 목도하고 힘을 보탤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보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그의 머리카락도 어느새 희끗희끗해졌지만 여전히 오랜 꿈 좆아, 소명을 따라 전진하는 한 그는 영원한 청년일 것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50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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